2)삼국의 성장
(1)백제
-근초고왕(부여구)
①부자 상속의 왕위 계승
②마한의 잔여 세력 정복
③평양성 공격 및 고국원왕 전사
④요서지방 진출하여 요서군 설치
⑤남조의 동진, 왜와 교류(칠지도)
⑥왕비도 진씨에서 배출
⑦고흥이 “서기” 집필
⑨낙동강 유역의 가야에 대해서도 지배권 행사→장군 목라근자에 의해 가야 7국 통합
⑩아직기를 통해 일본에 한자 전파
⑪왕인이 “논어”,“천자문”을 전해주고 경사를 가르침
*백제의 해상왕국
①무역로를 주도하던 낙랑군의 멸망 및 중국의 혼란→고구려와 경쟁하여 예성강 하구 지역 획득
②마한의 금관가야 압박
③왜와 우호관계
*백제 삼서 : 백제기, 백제신찬, 백제본기
*요서점령설 ①긍정론 ⦁백제가 요서 지방에 진출하여 진평군, 백제군 설치 ⦁신경준의 “동국문헌비고”“여지고” 소개 ⦁임수도, 정견, 신채호, 정인보, 김상기, 김철준 계승 ⦁북조는 수치를 기록하지 않음 ②부정론 ⦁한진서의 “해동역사” ⦁일본인 연구자 ⦁백제가 요서지방을 영유했다는 진 말기에는 모용씨가 요서를 점유 ⦁당시 중국과 백제의 지리적 관계를 볼 때 수긍x ③수정론 : 다른 세력이 차지 ⦁양직공도 : “진 말기에 구려가 요동을 차지하니 낙랑 역시 요서 진평현을 차지했다.” |
*칠지도 [앞면 풀이]태△ 4년 5월 16일은 병오인데, 한낮에 백 번 제련한 쇠로 칠지도를 만들었다. 나아가 온갖 적병을 물리칠 수 있으니, 제후국의 왕에게 나누어 줄만한다. △△△△ 상서로 우리라 [뒷면 풀이]지금까지 이러한 칼은 없었는데, 백제 왕세자 기생성음이 일부러 왜왕 지를 위해 만들었으니 후세에 전하여 보아라. *서기 근초고왕 30년(360), 옛 기록에는“이때에 와서 박사 고흥이 처음으로 “서기”를 썼다.”라고 하였다. <삼국사기> *백제의 요서진출 -백제국은 본래 고구려와 더불어 요동의 동쪽 천여 리에 위치하였다. 그 뒤 고구려가 요동 지역을 차지하자, 백제도 요서 지역을 점령하였는데, 백제가 다스린 곳을 진평군(진평현)이라고 불렀다. <송서> -그 나라(백제)는 본래 고구려와 함께 요동의 동쪽에 있었다. 진나라 시기에 고구려가 먼저 요동 지역을 차지하니, 백제도 또한 요서와 진평 2군을 장악하고, 스스로 백제군을 설치하였다. <양서> |
-침류왕 : 불교공인(동진의 마라난타가 전래)
-아신왕 : 고구려 광개토왕의 침략으로 세력 약화
-비유왕(부여비)
①눌지 마립간과 나제동맹→중국의 남조, 한반도 남부, 왜와 연결하는 동맹을 구성→남조의 송과 신라에 사신 파견
②김제 벽골제 설치
③중국 남조의 송에서 유교 서적인 “역림” 등이 들어옴
-개로왕(부여경)
①신라와 화친을 맺고 북위에 고구려 정벌 요청
②장수왕에게 전사(→웅진으로 천도)
-문주왕
①웅진 천도(공산성)
②한강 상실로 무역의 침체
③귀족 세력의 국정 주도 및 귀족 내부 권력 다툼 →왕권 약화
-동성왕(모대,부여태)
①신라(소지마립간과 결혼동맹 : 이찬 비지의 딸과 결혼 ) 및 가야와 군사 동맹=외척세력을 약화하고 신라와의 동맹관계를 강화
②남제와의 교류 : 남제로부터 받은 선진 문물과 관직을 신진 세력에게 하사함으로써 지배세력을 재편하고자 함
②신진세력 등용 : 외척세력을 배제하고 웅진 토착세력 등용
③탐라국 복속
④왜와 혼인 동맹 : 백제 공주들이 천황과 혼인 ,백제 왕자들은 일본에서 황실과 결혼하여 살다가 귀국하여 왕위 즉위
⑤백가의 난으로 사망↔무령왕이 진압
*동성왕 때 남제에게 보낸 국서 : 흉리, 험윤=오랑캐=위나라 or고구려
-무령왕(부여융=사마)
①22담로를 설치하고 왕족 파견 : 지방 통제 강화
②가야 지역 진출
③양과 교류할 때 신라와 가야를 속국으로 소개
④무령왕릉
⑤오경박사 단양이, 고안무를 일본에 보냄
⑥민생안정 노력 : 굶주리는 백성을 위해 창고를 풀어 도와주었고 먹을 것 없이 떠도는 이들은 고향으로 돌아가 농사를 짓게 함
⑦한강 북쪽 지역 주민을 동원하여 쌍현성을 쌓아 외국침략에 대비
⑧흩어진 유민을 호적에 올리고 제방을 쌓는 등 농업 생산의 기반을 다짐
-성왕(명농)
①수도 천도(웅진→사비)(=부여=소부리, 부소산성)
②국호 남부여
③신라,가야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정벌하여 한성, 남평양(아차산 일대) 진군→일시적 한강유역 회복→신라의 배신으로 왜와 대가야를 끌여들여 백제 공격→ 관산성 전투에서 패배
④방군제 : 전국을 5방으로 나누고 그 밑에 군과 성을 둠
⑤22부사제
⑥수도는 5부로 나눔
⑦오경 중의 하나인 “모시”의 박사를 보내 줄 것을 양에 요청
⑧승려 겸익의 율종
⑨노리사치계를 통해 불경과 불상 전파
-위덕왕(부여창)
①위기를 수습하고 중국 남북조와 외교 관계 강화
②창왕명조사리감(능산리 사리에서 불견) 제작
③일본 쇼토쿠 태자의 초상화 제작(아좌태자)
-무왕
①한강 하류와 옛 가야 지역을 되찾고자 두 방면으로 신라를 공격하여 경상남도 서부 지역을 일부 차지
②익산에 미륵사 건립, 부여에 왕흥사 건립
③천도시도 : 사비→익산
④당 고조로부터 대방군왕 백제왕 칭호를 얻음
-의자왕(=해동증자)
①대야성 등 확보
②귀족 세력을 누르고 개혁 단행
③사택지적비
④좌평 성충 , 충신 흥수 등이 옥사=집권층 내분
*백제의 천하관 : 일부 마한 소국을 남만으로 부르며 탐라에게 조공받음
*예식진의 난 : 의자왕을 배신
*개로왕이 북위에 보낸 국서 (백제는) 고구려와 더불어 근원이 부여에서 나왔습니다. 선조 시대에는 고구려가 옛 정을 존중하였는데, 그의 조상 사유가 경솔하게 우호 관계를 깨뜨리고 직접 군사를 거느려 우리 국경을 침범하여 왔습니다. 저의 할아버지 수(근구수왕)가 군사를 정비하여 번개같이 달려가 …… 쇠(고국원왕)의 목을 베어 달았습니다. 이로부터 감히 남쪽을 돌아다보지 못하였습니다. 풍씨(북연의 황제)가 운수가 다해 그 남은 세력이 (고구려에) 들어가자 점차 강성해져 드디어는 우리가 능멸과 핍박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 속히 한 장수를 보내어 신의 나라를 구해 주십시오. <삼국사기> *(고구려 승려) 도림은 거짓으로 죄를 짓고 도망하여 온 것 같이 하여 백제로 들어왔다. 이때 백제 근개루왕이 바둑과 장기를 좋아하였다. …… 왕이 불러들여 바둑을 두어 보니 과연 국수(國手)였다. 이에 그를 높여 최고 손님으로 삼고 매우 친하게 지냈다. ……이에 도림이 돌아와 이를 보고하니 장수왕이 기뻐하며 장수들에게 군사를 나눠 주었다. 근개루가 이 말을 듣고 아들 문주에게 말하기를 “내가 총명하지 못해 간사한 사람의 말을 믿고 이렇게 되었다.”라고 하였다. <삼국사기> *나제동맹 -소지마립간 15년(493년) 3월에 백제왕 모대(동성왕)가 사신을 보내 혼인을 청하매 왕은 이벌찬 비지의 딸을 보냈다. -16년(494년) 7월 장군 실죽 등이 살수의 들에서 고구려와 싸워 이기지 못하고 물러와 견아성을 지키매 고구려병이 이를 포위하였는데, 백제왕 모대가 군사 3000명을 보내 신라군을 도와 고구려병의 포위를 풀게 하였다. *양직공도 521년 여륭(무령왕)이 사신을 보내 글을 올렸는데, 고구려를 잇달아 격파했다고 하였다. …… 모두 22담로가 있는데, 왕실 자제들에게 나누어 다스리게 하였다. *무령왕 이름이 사마이고 모대왕의 둘째 아들이다.……사신을 양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12월에 양 고조가 조서를 보내 이국왕을 책봉하며 말하기를 “그의 정성이 지극하여 짐은 이를 가상히 여긴다. 옛 법에 따라 이 영광스러운 책명을 보내는 바, 사지절 도독 백제제군사 영동대장군으로 봉합이 가하다.”라고 하였다. *관산성 전투 1)백제의 왕 명농(성왕의 이름)이 …… 관산성(충북 옥천)을 공격하였다. 각간 우덕과 이찬 탐지 등이 맞서 싸웠으나 전세가 불리하였다. 신주의 김무력이 주의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교전하였는데, 비장인 삼년산군(충북 보은)의 고간 도도가 급히 쳐서 백제왕을 죽였다. <삼국사기 신라 본기> 2)성왕 32년(554) 가을 7월에 왕이 신라를 습격하기 위하여 직접 보병과 기병 50명을 거느리고 밤에 구천(충북 옥천 부근)에 이르렀는데, 신라의 복병이 나타나 그들과 싸우다가 왕이 난병들에게 살해되었다. <삼국사기 백제 본기> 3)신라는 명왕(성왕)이 직접 왔음을 듣고 나라 안의 모든 군사를 내어 길을 끊고 격파하였다. …… 얼마 후 고도(도도)가 명왕을 사로잡아 두 번 절하고“왕의 머리를 베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 명왕이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고 눈물을 흘리며 허락하기를 …… 고도는 머리를 베어 죽이고 구덩이에 파묻었다. <일본서기> *무왕의 외교 당 고조4년(621) 백제 무왕이 사신을 보내 와 과하마를 바쳤다. 7년에 또 대신을 보내 와 표문을 올리고 조공을 바쳤다. 고조는 그 정성을 가상히 여겨, 사신을 보내어 대방군왕 백제왕으로 책봉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