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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

by 히스토리 모어 2021. 10. 11.

2.고조선의 성립과 성장과정

1)고조선의 성립

-단군신화

①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는 홍익인간의 통치 이념

②하늘의 자손임을 내세우는 선민사상

③농업 중심의 사회

④단군왕검=제정일치 사회(단군 : 종교적지배자+왕검 : 정치적 지배자)

⑤곰과 환웅, 호랑이를 통해서 토테미즘과 부족 연합의 성격

*단군 신화가 수록된 문헌 : 삼국유사, 제왕운기, 세종실록지리지, 응제시주, 동국여지승람, 동국통감

-삼국유사

①고조선조에 단군조선과 기자 조선을 함께 기록

②건국 연대를 여고동시로 기록

-제왕운기

①단준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을 기록하여 3조선으로 구분

②환웅의 손녀와 박달나무 신의 결합으로 단군 탄생 설명

-고조선에 대한 중국 사서들

①관자 : 중국 사서 중 고조선을 기록한 현존 최고의 사서→제나라와 무역을 한 흔적

②전국책 : 소진→연문후“연의 동쪽엔 조선 요동이 있고, 북쪽에는 임호,누번이 있으며”

③위략 : 조선과 연이 각축

*고조선의 건국에 관한 기록
하늘의 제왕인 환인에게는 환웅이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환웅은 천하에 뜻을 품고 인간 세상을 다스리고자 하였다. 이에 환인은 아들의 뜻을 알고 천부인 세 개를 주고 뜻을 펴기에 적당한 삼위태백에 내려가 인간 세상을 다스리게 하였다. 환웅은 3,000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태백산 꼭대기 신단수 아래에 내려와 그곳을 신시(神市)라 불렀다. 그때부터 환웅 천왕은 풍백, 우사, 운사를 거느리고 곡식, 수명, 질병, 형벌, 선악 등 360여 가지의 일을 주관하며 인간 세상을 교화하였다.
곰 한 마리와 호랑이 한 마리가 같은 굴에서 살았는데, 환웅에게 사람이 될 수 있게 해 달라고 빌었다. 이에 환웅은 쑥 한 다발과 마늘 스무 개를 주면서 말하였다. “너희들이 이것을 먹고 100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는다면 곧 사람이 될 것이다.” 곰과 호랑이는 동굴에서 쑥과 마늘만 먹으며 지냈다. 금기를 지키기 시작한 지 삼칠일(21일) 만에 곰은 여자가 되었지만, 호랑이는 금기를 지키지 못하여 사람이 되지 못하였다. 웅녀는 혼인할 상대가 없어 늘 신단수 아래에서 잉태하기를 축원하였다. 이에 환웅은 잠시 사람으로 변하여 웅녀와 사랑을 나누었고, 웅녀는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다. 그가 단군왕검이다. 단군왕검은 요임금이 즉위한 지 50년인 경인년에 평양성에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조선이라고 하였다.

2)고조선의 발전과 세력범위

-왕의 호칭 사용 ex)부왕,준왕

-부자상속 ex)부왕→준왕

-상,대부,장군, 박사 등의 관직 등장

-국가 중대사 결정 : 왕과 상이 참가한 회의에서 결정

-제나라와 교역하며 선진 문물을 수용

-고조선과 연

①주가 쇠약해지자 연과 조선이 왕을 칭함

②연의 침공 기도에 맞서 선제 공격

③대부 예를 파견해 외교 교섭 전개

④요서 지방을 경계로 중국의 연과 교류하거나 대립

⑤연의 장수 진개의 침략을 받아 서쪽의 영토를 상실(만번한을 경계)하고 수도를 왕검성으로 이전

-부왕, 준왕 등이 고조선 재부흥

-고조선 문화 범위 : 비파형 동검, 탁자식 고인돌, 거친무늬 거울, 미송리식 토기, 팽이형 토기

*중국 선양 정가와자 유적 : 랴오허 강 중류의 덧널무덤 유적으로 비파형 동검, 청동 단추 등 장신구, 재갈과 같은 마구류가 다수 출토로 이 지역은 고조선의 초기 근거지 중 하나

-사마천의 사기 : “조선의 서쪽에 산융, 동호 등의 종족이 있어서 100여 종족의 오랑캐가 하나로 통일되지 못하였다.”

*고조선의 위치에 관한 논쟁

①대동강 중심설 : 이병도

②요동 중심설 : 신채호, 정인보

③고조선이 초기 랴오허 동쪽에 중심을 두었으나 후에 왕검성을 중심으로 독자적인 문화를 이루었다고 설명하는 것이 일반적

*기자조선

①“상서 대전” 등에는 주 무왕이 기자를 ‘조선후’에 봉하였다는 기록이 나오고 있으며, “한서”에 ‘상(은)의 도가 쇠해지자 기자가 조선으로 가서 그 백성으로 하여금 예의에 힘쓰고, 농사짓고 누에를 쳐서 길쌈하도록 가르쳤다.’라는 기록→이를 근거로 기자를 성현으로 숭배

②기자가 시서예약을 가르치고(=한자생활의 시작), 팔조교를 베풀고, 정전제 실시

③박달나라→조선

④강상무덤과 누상무덤으로 조선의 영역 확인

⑤기자 조선의 반대

⦁기자조선에 관한 기록이 선진문헌에 대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점

⦁황하 중류와 고조선 사이에 왕래가 현실적으로 어려웠다는 점

⦁기자가 살았다는 황허강 지역과 고조선 지역의 문화 사이에 상관 관계가 없다는 점

*고조선과 연의 대결
“위략”에 보면 이런 말이 있다.
옛날에 주가 쇠하고 연이 자기 스스로 높여 왕이라 칭하며 동쪽으로 땅을 빼앗으려 하자, 기자의 후손 조선후도 또한 왕이라 칭하고 군사를 일으켜 연을 쳐서 주 왕실을 높이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 나라 대부 예가 간언하므로 그만두었다. 그리고 예를 서쪽으로 파견하여 연을 설득하게 하니 연도 전쟁을 중지하고 침공하지 않았다. 그 뒤 자손들이 점점 교만하고 포학해지자 연은 장군 진개를 보내 조선의 서쪽을 쳐서 2천여 리의 땅을 빼앗고 만번한에 이르러 국경을 삼았으니, 마침내 조선은 쇠약해졌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3)위만 조선의 성립과 발전

-진‧한 교체 시기에 위만은 준왕을 몰아내고 왕이 됨(기원전 194)

-준왕은 남쪽 지방 진국(익산)으로 내려가 ‘한왕’이 됨

-연나라 출신 위만=조선인

①상투를 틀고 조선인의 옷을 입고 있었던 점

②왕이 된 뒤에도 국호를 유지

③토착민 출신이 높은 관직에 앉은 점

-위만이 가져온 철제무기를 가지고 진번과 임둔을 복속

-토착세력을 포용하기 위해 ‘상’이라는 벼슬을 줌

-위만조선의 문화 범위 : 세형동검, 잔무늬거울

-한의 고조선 공격

①중국의 한과 한반도 남부 사이에서 중계무역 실시

②흉노와 고조선의 연결 우려

↔①고조선과 한의 화평 교섭 실패 ②한 무제의 침략 및 고조선 멸망(기원전 108)

*한과의 외교 정책에 불만을 품은 역계경이 2천호를 거느리고 남하

-예의 군장 남려가 한의 요동군에 복속해오자 한 무제는 예의 지역에 창해군 설치→섭하가 조공 요구, 비왕 장 살해↔섭하 살해

-패수 전투 : 한과의 전쟁에서 고구려가 승리한 전투

-주화파 이계상 삼의 우거왕 살해 vs 대신 성기의 항전

-한 군현 설치(진번군, 임둔군, 현도군, 낙랑군)→태수 파견

①기원전 82년 진번과 임둔이 토착인의 저항을 받아 폐지→관할 지역을 낙랑군과 현도군에 합침

②현도군은 고구려의 저항을 받아 만주 흥경지방으로 밀림→변군에 동부도위, 남부도위 설치

③204년 요동 공손강이 황해도에 대방군을 설치했는데 , 훗날 백제가 멸망시킴

-낙랑군의 독립국화

①1c 초 토호세력인 왕조가 반란을 일으켜 태수 유헌을 죽이고 7년간 자치→왕존에 의해 평정 : 동부도위, 남부도위 폐지

②토착인 최리는 스스로 낙랑국왕을 칭하면서 자치

-한4군의 통치

①한의 상인까지 진출하여 동방의 경제적 이득을 추구 : 조세 수탈, 변한의 철 교역, 진한의 목재

②염사치 사화 =한인들이 마한의 목재를 구하려 하였다는 사실+한의 거수들이 한군현의 관작과 의책을 탐함으로써 한 군현의 토착사회 분열정책 성공

-군현 축출을 위한 정치적 결집은 군장국가의 발전을 촉진하고 초기 국가 성립의 계기

*점제현 신사비

*부조 예군 도장 : 부조(원산 부근) 지역 우두머리가 낙랑군에서 받은 도장으로 기원전 1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평양의 적백동 1호 무덤에서 나옴

*철제검 : 고조선 멸망 후 유민들이 한반도 남부로 이동하였다는 기록을 근거로 낙랑·고조선 계의 유물로 추정

*위만의 고조선 이주
20여 년이 지나 진승과 항우가 일어나 천하가 어지러워졌다. 연·제·조 백성들이 괴로워하다 차츰 주에게 도망하였다. 준은 이들을 서쪽 지방에 살게 하였다. 한이 노관을 연왕으로 삼자 조선과 연은 패수를 경계로 삼게 되었다. 노관이 한을 배반하고 흉노로 도망한 뒤, 연나라 사람 위만도 망명하여 오랑캐 복장을 하고 동쪽으로 패수를 건너 준에게 항복하였다.


*중계무역
우거왕 때 이르러…진번 주변의 여러 나라가 글을 올려 천자를 알현하고자 하는 것을 가로막고 통하지 못하게 하였다.
<사기>
*고조선에 대한 중국 측 기록
-중국의 제와 교역하였다. <관자>
-조선인은 교만하고 사납다
-중국의 연이 왕을 칭하며 고조선을 치려하자, 고조선 역시 왕을 칭하며 도리어 연을 치려 하였다.
-연에서 장수 진개를 보내 조선 서쪽의 땅 2000리를 빼앗았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고조선의 유이민
-조선 후(侯) 준(준왕)이 분수를 모르고 왕을 칭하다가 연에서 망명한 위만의 공격을 받아 나라를 빼앗기자, 그 측근 신하와 궁인들을 거느리고 달아나 한(韓) 땅에 들어가 스스로 한왕이라고 불렀다.
-일찍이 우거(고조선 마지막 왕)가 아직 격파되기 전에 조선상(朝鮮相) 역계경이 우거에게 간언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진국(辰國)으로 갔다. 그때 백성 중 그를 따라가 산 사람이 2천여 호나 되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4)고조선의 사회

-왕 아래 상, 대부, 장군, 대신, 박사

-상 : 지역 집단의 우두머리로 상 밑에 읍락을 자치적으로 이끈 족장 존재

-조선상, 니계상 =지역을 이용한 관명 : 지역집단의 대표로서 중앙정부에 참여

-도둑이 거의 없어 대문을 닫지 않음

-순장의 풍습 ex)강상 무덤, 누상 무덤

-여자는 모두 정조를 지키고 신용이 있어 음란하고 편벽된 짓을 하지 않는다=가부장적 제도

-8조법 (in <한서지리지>)

①사람을 죽인 자는 즉시 죽인다(=인간 생명 중시, 노동력 중시)

②남에게 상처를 입힌 자는 곡식으로 갚는다(=사유 재산 제도 발생)

③도둑질한 자는 노비로 삼는다(=계급의 분화), 단, 용서를 받고자 하는 자는 50만전을 내야한다(=화폐의 사용)

-8조법→고조선 멸망 후 60여 조로 증가

*한 사군에 관한 왜곡 : 이마나시 류의 ‘조선사의 길잡이’에는 조선사가 한사군부터 시작한다고 서술↔①한4군이 동시에 존속한 기간은 25년에 불과 ②한이 멸망한 이후 낙랑군은 한과 전혀 무관한 지역 =낙랑군은 통치 기구라기보다는 중국과의 무역과 외교를 수행하는 조계지와 비슷한 기관

*8조법
…(고조선에서는) 백성들에게 금하는 법 8조를 만들었다. 그것은 대개 사람을 죽인 자는 즉시 죽이고, 남에게 상처를 입힌 자는 곡식으로 갚는다. 도둑질 한 자는 노비로 삼는다. 용서받고자 하는 자는 한 사람마다 50만 전을 내야 한다. 비록 용서를 받아 보통 백성이 되어도 사람들은 이를 수치스럽게 여겨 결혼을 하고자 해도 짝을 구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그 백성들이 도둑질을 하지 아니하므로 문단속을 하는 일이 없었다. 이러해서 백성들은 도둑질을 하지 않아 대문을 닫고 사는 일이 없었다. 부인은 적숭하고 신의가 있어서 음란하지 않았다. 군을 설치하고 초기에는 관리를 요동에서 뽑아 왔는데, 이 관리가 백성이 문단속하지 않는 것을 보았다. 장사하러 온 자들이 밤에 도둑질하니 풍속이 점차 야박해졌다. 지금은 금지하는 법이 많아져 60여 조목이나 된다.
<한서>
*고조선의 관제와 사회 구조
-좌장군(순체)이 …… 급히 조선을 공격하였다. 조선상 노인, 상 한음, 장군 왕겹 등이 서로 모의하기를 …… 모두 도망하여 한에 항복하였는데, 노인은 도중에 죽었다.
<사기>
-(고조선의 마지막 왕) 우거가 아직 격파되지 않았을 때에, 조선의 상(相)인 역계경이 우거왕에게 간언하였지만 채택되지 않았다. 이에 (역계경이) 동쪽의 진국으로 가니 2천여 호의 백성이 따라 나섰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