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
3)연맹 왕국 가야
-철을 낙랑군과 왜에 수출→금관가야 중심(김수로=뇌질청예)
-철+수로 교통의 이점→국가 발전=6가야 : 금관가야(김해), 소가야(고성), 아라가야(함안), 고령가야(함창), 대가야(고령), 성산가야(성주)
-금관가야는 낙랑군을 통해 일본에 선진문물을 전해주었고 그 대가로 노동력이나 군사력 제공 받음
-금관가야의 왜 교역 : 2c이후 일본의 북규슈 일대의 소국들과 교역→3c에 산인, 산요 지방을 거쳐 긴키 지방까지 교역 확대
-가야 연맹 내부에서 포상 8국의 난 발생→신라 내해 이사금의 도움으로 진압
-백제의 남해안 진출+낙랑군과 대방군의 멸망+광개토 대왕의 공격→ 대가야(이진아시왕=뇌질주일) 중심으로 변환
-대가야
①대가야 성장 배경
⦁국내 : 농업과 철제를 기반으로 성장
⦁국외 : 백제와 신라가 고구려의 남진을 막는데 집중
②백제의 혼란을 틈타 섬진강 유역으로 확대
③나제동맹에 힘을 보탬ex)신라를 공격한 고구려 군대를 백제와 함께 물리침
④남제에 사신을 보냄
⑤신라와 결혼 동맹(이뇌왕) “법흥왕 9년 가야국왕이 사신을 보내 혼인을 청하니, 왕이 이찬 비조부의 누이를 보냈다.”
*이뇌왕 : 신라 왕녀 사이에 월광 태자를 낳았는데, 월광태자는 석가모니의 전생 이름으로 그 때부터 불교에 대한 인식이 있었다고 봄
-6세기 중엽에 백제를 통해서 왕권 강화를 위해 불교를 받아들였지만 실패
-금관가야가 멸망 이후
①대가야의 북부 가야와 아라가야의 남부 가야로 분열
②신라가 가야를 압박하자 가야연맹은 하나로 뭉쳐 백제와 동맹을 맺고 대항
③백제와 가야 연합군이 관산성싸움에서 패하자 가야 연맹은 급속히 쇠퇴
-가야 멸망 원인
①각 소국이 독자적인 정치 기반을 유지하였기 때문에 지배력을 한데 모으지 못함
②백제와 신라 사이에 위치하여 두 나라의 압력을 받음
③산악 지역이 많음
④규슈지역으로 힘을 분산
-신라의 법흥왕 때 금관가야, 진흥왕 때 대가야가 정복당함
-가야 토기 : 형태와 문양에서 보이는 안정감과 유연한 곡선의 흐름이 인근 신라 토기와 구별되는 고유한 특징& 일본의 스에키 토기에 영향
-가야의 덩이쇠 : 화폐 역할

-우륵의 가야금 제작(충주 탄금대)
-청동그릇 : 중국식 청동기로 가야와 중국의 교류를 보여줌
-사슴뿔 머리 장식 : 북방 민족과 가야의 교류를 짐작
-가야의 파형동기 : 일본에서 출토되는 방패 꾸미개로서 가야와 왜의 교역을 보여줌
-‘하부사리리’ 명 토기 : ‘하부사리리’라는 글자가 있어 대가야가 ‘하부’를 비롯한 여러 정치 집단으로 구성
*가야 연맹이 고대왕국으로 발전하지 못한 이유
①6가야의 세력이 우열을 가리기 힘들었다
②백제와 신라 등 주변 국가의 압력으로 정치적 발전이 미숙
③한 군현의 소멸로 교류 대상이 축소되어 경제력이 약화
*대성동 고분군 : 금관가야 무덤(=순장을 했다는 것을 확인)
*고령 지산동 고분군 : 대가야 지배층 무덤
*가야 사회에서 순장이 성행한 것은 각 단위 소국 수장들의 권력이나 연맹장의 권력이 강화되었으나 아직 중앙 집권적 지배 체제가 제도화되지 못한 상태에서 나온 현상
*최치원의 “석리정전”
①금관국의 시조 : 뇌질청예(=김수로)
②대가야국의 시조 : 뇌질주일(=이진아시왕)
*임나일본부설
①주장 : 일본 야마토 정부가 가야 지방(임나 가야)을 근거로 한반도 남부(백제와 신라)를 지배했다는 학설
②목적 : 타율성론(남선경영론)의 근거로 이용
③반박
⦁일본서기는 오류가 많음
⦁일본 호칭은 7세기 이후 등장
⦁광개토대왕릉비의 주어는 고구려
⦁칠지도 : 백제왕이 헌상을 한게 아니라 하사를 한 칼
| *가야 건국 이야기 천지가 개벽한 뒤로 가야 지방에는 아직 나라가 없고 또한 왕과 신하도 없었는데, 단지 아홉 추장이 각기 백성을 거느리고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아홉 추장과 사람들이 노래하고 춤추면서 하늘을 보니 얼마 뒤 자주색 줄이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땅에 닿았다. 줄 끝을 찾아보니 붉은 보자기에 금빛 상자가 싸여 있었다. 상자를 열어 보니 황금색 알 여섯 개가 있었다. ……열사흘째 날 아침에 다시 모여 상자를 열어보니 여섯 알이 어린 아이가 되어 있었다. 용모가 뛰어나고 바로 앉았다. 아이들은 나날이 자라 십 수일이 지나니 키가 9척이나 되었다. 얼굴은 한 고조, 눈썹은 당의 요임금, 눈동자는 우의 순 임금과 같았다. 그 달 보름에 맏이를 왕위에 추대 하고 수로라 하였다. 그가 곧 가락국 또는 가야 국왕이며, 나머지 다섯도 각각 다섯 가야의 임금이 되었다. <삼국유사> *대가야의 건국 설화 본래 대가야국이었다. 시조 이진아시왕부터 도설지왕에 이르기까지 모두 16세 520년이었다. 최치원의“승려 이정 전기”에 이르기를 ‘가야산신 정견모주가 천신 이비가지에게 감응되어 대가야왕 뇌질주일과 금관국왕 뇌질청예 두 사람을 낳았다.’고 한다. 그러므로 뇌질주일은 곧 이진아시왕의 별칭이고, 청예는 수로왕의 별칭이 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대가야와 제나라 (고구려는) 배를 타고 바다로 다녀서 사신 왕래가 항상 있었다. 또한 북위에도 사신을 보냈지만 그들은 강성해서 제약을 받지 않았다. 북위에서는 여러 나라 사신이 거처하는 집을 두었는데 남제의 사신이 첫째이고 고려(고구려)가 그 다음이었다. <남제서> *대가야 남조와 교류 가라국은 삼한의 한 종족이다. 건원 원년(479)에 국왕 하지가 사신을 보내와 방물을 바치자 이에 조서를 내렸다. “널리 헤아려 비로소 올라오니 멀리 있는 오랑캐가 두루 덕에 감화됨이라. 가라왕 하지는 먼 동쪽 바다 밖에서 폐백을 받들고 관문을 두드렸으니, 보국장군 본국왕의 벼슬을 제수함이 합당하다.” <남제서, 동남이열전, 가라>  |